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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 해녀 마을 /제주의 해녀

비 청 2009. 11. 25.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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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해녀

제주특별자치도 바깥 사람들은 국내외인을 막론하고 제주해녀를 신비스럽게 여길 만큼 퍽 주목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제주특별자치도민들로서는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을 뿐더러 어머니나 누나가 해녀일 경우도 흔하므로 그저 평범하게 여긴다. 여느 여인들처럼 농사를 치르는 가운데 깊숙한 바닷속에 뛰어들어 해산물을 캐고 살림에 이바지하는 예사로운 여인들로 본다. 그럼에도 섬 바깥에서는 해녀라면 비범한 여인들로 보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①가녀린 여인들이 치르는 색다른 직종이라는 점, ②물질하는 솜씨나 의지가 초인적(超人的)이라는 점,③해녀의 분포 지역이 제주특별자치도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에만 국한되었다는 점, ④제주해녀들은 한 달 15일 이상이나 물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점, ⑤단지 제주 바다에서만 물질하는 게 아니라, 동북아시아 일대의 바다에까지 그 행동 반경이 뻗쳤다는 점, ⑥세계에서 특이한 민요인 <해녀노래>를 부른다는 점, ⑦여러 측면에서 소중한 연구대상이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1. 해녀는 특이한 직종

  이 세상에 사람살이의 직종이야 갖가지로 숱하지만, 해녀는 가냘픈 여인들이면서도 창망한 바다를 생업도장으로 깊숙이 무자맥질하면서 해산물을 캐어낸다는 점이 색다르다. 해녀를 처음으로 대하거나 말로만 들을 때에는 여인들의 일의 터전이 바다라는 점이 신기롭게 여길 수도 있다. 더욱이나 제주해녀들은 바다의 사정만 괜찮다면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사시사철 바다에 뛰어들므로 대견스럽게 볼 법도 하다.
따라서 조선조 때 정조(正祖) 임금이나 제주특별자치도백을 지냈던 기건(奇虔) 목사에 따른 일화의 의미도 짐작될 만하다. 어느날 정조 임금의 수라상에는 색다른 찬거리가 눈에 띄었는데, 주변에 확인했더니 제주해녀들이 목숨을 걸고 캔 진상품이라는 사실을 소상히 듣고, 그렇게 귀한 식품을 차마 먹을 수 있겠느냐고 들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겨울, 세종 때의 제주목사 시선이 초도순시하느라고 섬을 뱅 돌 때였다. 어느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거의 벌거벗은 여인들이 바닷물 속으로 풍덩풍덩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수행원들에게 사연을 소상히 들었다. 제주여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이처럼 모진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자맥질해서 해산물을 캐고는 살림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샅샅이 듣고 난 다음부터는 해녀들의 채취물은 한평생 먹지 않았다는 갸륵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교과서적 교훈이 담신 일화이면서, 해녀들이 겪는 비범한 쓰라림이 널리 공인됐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2. 해녀들의 초인적인 기량

제주해녀들은 물질하는 기량이나 의지가 초인적이기 때문에 세인들은 이들을 예사롭지 않게 주목한다. 특별한 장비를 갖추지 않은 나잠어법(裸潛潛漁法)으로 바닷속 20미터까지 들어가서 2분 남짓 견뎌내면서 해산물을 캐어내는 기량은, 특히 생리학적, 의학적인 소중한 연구과제로 등장했다. 더욱이나 추운 겨울 날씨에도 해산물을 캐어내는 비상한 내한력(耐寒力)도 수수께끼처럼 관계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1960년대에 미국 국무성에서는 심해공사(深海工事)의 능률을 높이고 군사력을 증강키 위하여 뉴욕주립대학의 허어만ㆍ란 (Hermann Rhan)교수와 연세대 홍석기교수에게 의뢰하여 한국과 일본의 해녀를 조사, 연구케 한 일마저 있다.비범한 제주해녀의 기량에 대해서는 세계의 생리학자, 의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연세대에서 연구가 진척되더니, 얼마 전에는 부산의 고신대(高神大)에서 국제학술회의를 주관하고 서울대의대와 제주의료원에서 공동조사를 실시하는 등 상당 기간 열의가 드높다.

제주해녀를 주목하는 이유의 하나로는 한 달에 15일 이상이나 물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이다. 물론바다의 사정에 따라서 다달의 작업일수는 달라질 수 있지만, 한 달 15일 이상 작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리학적, 의학적으로 놀라운 사실로 인식되는 듯하다.더욱이나 분만 직전까지도 물질하고, 분만한 다음 가다가 사나흘 만에 또 다시 시퍼런 바닷속으로 띄어든다니 예사롭질 않다.

이는 단지 생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억척스레 살아가려는 의지가 곁들었으므로 노동의 신성성을 중시했던 해녀들의 삶에서 우리는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된다. 더욱이나 물질하는 동안 배 위에서, 물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분만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는 일본해녀들의 경우에도 가끔 드러난다.

3. 한국과 일본에만 분포

제주특별자치도를 중심으로 해녀는 일종의 직업으로서 한국과 일본에만 분포되었다는 점에서 희귀하게 부각된다. 더욱이나 제주특별자치도는 해녀의 발상지로 추정되고 있으며, 해녀가 가장 밀집되어 있다. 무자맥질하면서 가다가 해산물을 캐어내는 사람들은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다. 다만 생계를 유지하는 본격적인 생업으로서 물질하는 해녀들이 한국과 일본에만 분포된 까닭이 과연 무엇인지는 아직 해명할 길이 없다.

물론 일본에는 ‘오도아마’[海士]라는 남성나잠업자도 상당수 흩어져 있다. 어쨌든 한국과 일본에만 해녀가 분포된 까닭의 하나로는 예전에는 미역을 주로 캐었는데. 한국과 일본인들이 미역을 비롯한 해조류를 즐겨 먹어 왔다는, 식품과의 관련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4. 동북아시아의 바다로 진출

제주해녀의 활동 무대는 제주특별자치도 연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동북아시아의 바다에까지 행동  반경이 뻗쳤었으니, 한반도의 각 연안과 크고 작은 섬에까지 물질나갔는가 하면, 일본의 여러 연안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등지까지 멀찌막이 진출했었다. 동북아시아 일대의 바다가 또 하나의 제주해녀의 밭이요, 집안이었다는 말이 된다
.
제주해녀들은 이른 봄에 무리지어 국내외로 나갔다가 추석 직전에 돌아오곤 했으니, 말하자면 심상찮은 도민 대이동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수익과 권익을 여지없이 짓밟히면서도 제주해녀들의 동북아 진출은 참으로 오달지고 옹골차게 주어진 삶을 개척해 나가는 생활투사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굳혀 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교훈적 무게도 육중하다.

이제도 한반도 곳곳과 부속도서들 및 일본 연안에도 예전에 물질을 나갔다가 눌러사는 제주해녀들이 적잖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제주해녀들만 모여사는 동네를 이룩한 예도 더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