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 글/박 래여
그 날 내가 지리산 밑에 있는 비구니 절인 대원사를 찾은 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같진 않다. 그 곳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이 세상 어디에서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지 못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육이오라는 동족 상잔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남았으리란 보장도 없었고, 이미 남의 땅이 되어버린 북녘 땅을 다시 가 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나의 꿈속의 여인이었다. 내 칠십 평생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 단 하룻밤의 연정이었다. 설령 그녀가 남한으로 피난을 왔다해도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가름했던 얼굴 윤곽만 남아 있을 뿐 흐릿한 흑백 사진속의 인물에도 못 미치는 기억이었다. 다만 그 가을 차고 깊었던 바람소리와 봉창을 통해 희뿌연하게 들어오던 달빛만이 내 기억 한 켠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섧게섧게 울고 있는 여인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지도 못하고, 옆에서 콜콜 잠이 든 여인의 어린 딸 등을 쓰다듬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꿈처럼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문득 절에나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내 머리속을 확 휘저었다.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 둥 하고 나갈 채비를 하자 며느리는 ‘아버님 어디 가시게요?’했다.‘답답해서 바람이나 쐬고 올란다.’면서 집을 나선 것이 지리산 대원사까지 달려버렸다. 아들이 사준 짚차 덕이지만 몇 년 전 저승 길 닦는다며 먼저 간 아내 덕이기도 했다. 아내의 조의금으로 장만해 준 차니까.
오월의 신록이 무르익을 대로 익어 포옥 감싸고 있는 절이었다. 예전에 더러 와 본 기억이 있는 절이건만 그 날은 모든 것이 생소하고 낯설어서 나는 조용한 절간을 혼자 휘적휘적 걸어다니며 구경을 했다. 간혹 절 마당을 지나거나 요사채 앞을 오가는 여승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와서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할 일 없는 늙은이가 절간에 와서 눈요기나 하는구나 싶어 내심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첫 눈에 알아보았다.
대웅전을 지나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아주 오래된 구층석탑이 있다. 그 앞에서 여승을 만났다. 다소곳이 합장을 하고 절을 하는 여승을 바라봤다. 여승의 몸에선 향긋한 취나물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맡은 기억이 나는 향기였다. 여승을 유심히 바라보던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스님! 혹시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여승은 고개를 들고 나를 마주봤다.
“나무관세음보살!”
여승의 입에서도 신음처럼 나무관세음보살이 터져 나왔다.
친구 같으면 덥석 손이라도 잡을 수 있으련만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 노인네가 늙은 여승의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승복 자락을 잡을 수도 없어 나는 마주 합장했던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올리지도 못하다가 뒷짐을 졌다.
“이렇게 살아있으니 뵙는군요.”
“제 방에 가셔서 차 한 잔 하시지요.”
나는 그녀를 따라 어기적거리며 요사채로 향하면서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다. 내가 열 여덟이었을까. 지금은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는 평안도 어느 깊은 산골 금광을 캐 내는 산촌에서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평안도까지 올라갔던 나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금광에서 노다지 캐면 집에 오겠다고 큰 소리치고 나선 길이지만 내 고향 창원에서는 너무 먼 거리였다. 해방 직후여서 나라 사정도 어수선 했다. 집에서 가지고 갔던 돈도 바닥나고, 부모님도 그립고 고향도 그리웠다. 나는 그 곳 주막집 봉놋방 하나를 얻어서 잠을 잤다. 낮에는 금맥을 찾는 사람들과 굴속을 기어다니다가 밤이면 축 늘어져 주막집을 찾아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떠내기들이 늘 북적거리는 주막집 앞에는 날마다 잘 익은 옥수수 함지를 가져다 놓고 쪼그리고 앉아 옥수수를 파는 파리한 여인이 있었다. 서너 살 짜리 어린 딸은 배 고프다고 징얼대며 옥수수 알을 따 먹었고, 여인은 한 푼이라도 돈 할 욕심으로 아이를 야단치다가 급기야 때리기까지 했다. 나중엔 땅바닥에 뒹굴면서 우는 아이를 안고 같이 울곤 했다. 나는 집에 갈 여비가 축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날마다 옥수수 한 개를 사서 아이에게 주었다.
내일이면 집에 가는 날이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아가야. 내일이면 아저씨는 멀리 간단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인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내 나이 또래 쯤 되었을까. 가난에 찌든 탓이겠지만 본 바탕은 참 고운 여인이구나 싶었다. 여인은 그 동안 고마왔다며 옥수수 몇 개를 싸서 주었다. 길 가다가 배 고프면 먹으라고 했다. 내가 한사코 받기를 거부하자 여인은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그만 엉엉 울었다.
“제가 국밥 한 그릇 사지요.”
여인은 순순히 따라왔다. 주막집 봉놋방에 앉아 아이와 셋이 국밥 한 그릇씩을 시켜 먹엇다. 내 수중에 여분으로 남은 마지막 돈이었다.
그 날 밤 여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눈물 겨웠다. 나보다 두 살 위라고 했다. 열 다섯에 부모가 맺어준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남자는 노름꾼에다 떠내기여서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다. 아이와 둘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여인은 옥수수 장사를 시작했다는 푸념이었다. 그 날 밤 여자는 내 옆에서 밤새도록 달빛만 적시다 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 선방에 들었다. 네모 반듯한 방엔 은은한 향내가 그윽했다. 벽에는 장삼 한 벌만 가지런히 걸려있다. 방 한쪽에 찻상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보온통에 담긴 뜨거운 물을 다관에 따르는 여승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쓸쓸한 낯빛은 옛날 가난에 찌들어 있던 그 얼굴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 때 보았던 눈빛은 아니었다. 맑고 투명한 눈빛이었다. 여승의 고운 자태는 늙었어도 늙음이 보이지 않았다.
“불편해 하지 마셔요. 늘 기도했답니다. 잘 사시라고.”
여승은 찻상을 앞에 놓고 그 위에 찻잔을 올리며 내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용기를 내어 묻고 싶었던 말을 물었다.
“그 아이는 어디 삽니까?”
여승은 잠시 열린 문 밖에 시선을 주었다. 절 마당엔 참새와 까치가 종종 걸음치며 놀고 있었다. 키 넘게 자라 너풀거리는 야자수와 대웅전 앞에 가득한 붉고 연한 장미꽃에 가 파르르 떨었다.
십년이었다. 집을 떠난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은 남편을 기다리며 딸과 둘이 고단한 삶을 살았다. 풀뿌리로 연명하면서도 그 산골을 떠지 못한 것은 남편이 돌아올 거라는 믿음 하나였다. 아니 단 하룻밤 풋정 나누고 떠난 청년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올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사랑한다는 말도 해 본 적 없지만 여인은 처음으로 마음이 따뜻했던 청년과의 하룻밤을 잊을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 가을 어느 날, 여인은 딸과 둘이 도라지를 캐려 산에 갔다. 보랏빛 도라지꽃이 터질것처럼 부풀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도라지 캐다가 말려서 아버지 오면 드리겠다고. 어쩌면 지금쯤 아버지가 저 언덕을 넘어 오실지도 모른다면서 아이는 자꾸만 산먼당을 향해 올라갔다. ‘엄마, 그 아저씨 기억나?’‘누구?’‘옥수수 아저씨!’‘응!’‘그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였음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난 아버지 얼굴을 모르잖아. 어렴푸시 생각나는 얼굴은 그 아저씨야. 엄마, 저기 도라지꽃 밭이다 빨리 가 보자.’아이는 나비처럼 나풀나풀 걸어갔다. 갑자기 ‘앗 따거!’소리와 함께 푹 주저앉았다. 여인은 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스르륵 미끄러져가는 가을 독사 한 마리. 아이는 그렇게 돌두덩으로 갔다.
슬픈 날이었다.
여인은 절을 찾아가 머리를 깎았다.
“참 옛날 일이지요. 그 아이 부처님 곁에 있습니다. 십 년이 넘도록 지 아비 기다리다가 도라지꽃 따라 갔지요. 도라지 꽃을 참 좋아했던 아이였지요. 그 가을 산꿩도 어찌 그리 섧게 울던지.”
내가 지리산 대원사를 떠날 즈음엔 서산에 걸린 저녁 햇살이 붉게붉게 타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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