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性談論과 女性性의 探究 * / 위재량(시인)
1. 우리나라 성의 現住所
성性:sex이라는 말을 바로 음란淫亂이나 에로eros로 연상하여 온 까닭에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 자체를 금기taboo하고, 입에 담는 것조차 창피스럽고 부도덕한 것으로 도외시 해버리고,그런 말을하는 사람을 음탕한 사람 또는 소위 쌍말로 색골sexmania 즉 남보다 섹정적色情約인 성도착증 환자쯤으로 경계하거나 천덕시賤德視하였으며, 단지 안방에서나 은밀히, 그나마도 부인들끼리만의 밀담 정도였던 것이 고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한편으론 성의 진담에 반하여 외설적인 농弄으로서의 성은 비교적 세속적인 편이었던 것이 사회통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대화를 하다가도 진한 음담패설淫談悖說만 나오면 희희낙락하게 되어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그러면서도 얘기한 사람을 색안시하는 경향이 있어온 것이 사실이며, 공산 독재사회에서도 수령을 찬양하는 말 이외에 관용을 베풀었던 유일한 언어가 유―머보다도 음담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성에 대한 인식이 묘하면서도 고루하였다. 그 이유는 유교의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은 전통과 씨족보존을 위한 남아선호사상의 관습 그리고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유교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 세대는 어떠한가? 온천지가 퇴폐적이고 외설적인 음란한 성 상품으로 홍수를 이루고 있으며, 백주대로에 버젓이 혼외정사를 위한 러브호텔 출입 장면이 가정집 거실 TV에 뉴스로 방영되고 있어도 그러려니 하는 윤리적 무감각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 여고생이나 여중생, 심지어 초등학생까지도 방과 후에 호출기 연락을 받고 야간 카페나 호스티스로 나가는가 하면 전화방이나 노래방 도우미로 나가는 현상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감히 부인할 수 없으리라. 그 후면에는 어린 소녀들이 영아를 버리거나 낙태를 아무 죄의식 없이 행하고 있으며 마치 이것이 혼전 통과의례처템 돼버린 생명 경시 풍조로 말미암아 생명의 외경畏敬따위는 헌 책자의 고전古典처럼 되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그뿐 아니다. 10대 미성년자들이 모방심리로 스스로 모델로 나서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하는가 하면, 10대 초등생이나 여중생들이 윤간을 당하고, 그 농락한 사람들이 죄의식을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상대 소녀를 헤프다고 비방하는 도덕불감증이 비일비재하고, 더 나아가서는 유치원 어린이를 범하는 페도필리아pedophilia: 小兒嗜好症의 성범죄를 저지르는 등 순간의 쾌락에 몸부림치는 인격부재의 치졸한 행태가 난무하는 세상인데도, 내 자식만 안전하면 된다는 이기주의와 입으로는 도덕군자인 척하면서 밤만 되면 유흥가에 가서 영계를 찾는 기성세대의 이중성과 고개 숙인 남편을 도와 재기회춘 시킬 생각은 않고 쉽게 번 돈을 헤프게 쓰는 꼴불견의 양상으로 젊은 제비들을 찾아 귀부인인 체 매매춘을 하는 유부녀들이 활보하는 우리 사회, 실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지상 최고의 번지 없는 주소로서 성범죄국인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슬프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행위는 말없는 무언의 만국공통언어이다. 아니 우주적 공용어이다. 동물이거나 인간이거나 간에 때가 되면 어느 정도 신체적으로 성숙해지고 정서적으로 발달이 되면 누가 가르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어떻게 하는 짓인가를 알게 되며 또한 성행위를 하며 즐긴다. 그런 인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개념이며 성에 대하여 자녀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보편적인 부모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것은 성에 대한 정체성正體性의 인식이 고루한 때문이며 성을 단지 관능적인 성행위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성을 단지 성행위로써 생물학적인 견지에서만 본다면 종족보존을 위한 생식수단에 불과하겠지만, 성의 개념과 인식이 많이 변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 성의 본질
한자로 性이란 글자는 마음 心변에 날 生자를 합한 말이다. 즉 생명에의 욕구라는 정신적 의미를 상징하는 표의表意어이다.
sex란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섹서스sexus에서 유래하였고 이는 <나눈다>라는 뜻의 secocut에서 파생된 것이다. 또한 segare(세가레: 절단하다, 분리, 구분의 의미)라는 라틴어에서 그 어원을 찾아 남과 여를 구분하는데 쓰여졌다고도 한다.
등양사상으로는 성이란 글자 그대로 인간 생명 자체로 보았고 사적인 것이며 결코 비밀스런 것으로 보지도 않았다. 성을 色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색이란 본다視 또는 색상color의 뜻도 있지만 성행동이나 성적인 쾌락 등 성적인 의미의 동의어로 쓰여지며 편안함을 얻고자 하는 쾌락 욕구를 뜻하기도 한다.
서구사상으로도 성이란 자웅을 표시하거나 색色(성적인 쾌락)을 표시하는 것만이 아니고 총체적인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이란 바로 인간의 본성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성은 신비하면서도 불확실의 영역이므로, 성에 있어 옳고,그르고, 좋고, 나쁘고 하는 성행동의 일률적 기준도 없다. 그러나 성이란 과거와 같이 성기性器 중심적, 성행위 위주인 인식에서 탈피하여야 하며, 인체적, 심리적인 여러 생물학적 인식과 더불어 종교, 사회, 문화, 예술 등의 정신적 인식과 사회 도덕적 윤리적인 인식에 대하여 연구하고 계몽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개념이 성립되었다.
3. 용어상의 문제
성적인 언어를 표현함에 있어 흔히 통용될 용어 제정이 시급한 문제다. 가령 성기를 표현함에 있어 재래적인 관습으로 대명사를 쓰거나 한문으로 또는 외래어로 표기를 하는데 그것마저 통일 된 것이 없다.
예를 들면, 체면문화 때문에 쓰는 대명사로 성기를 아래, 아랫도리, 거기, 그것 등이다. 서양에서도 최근까지 성기의 노골적인 표현을 기피하는 체면문화가 있어왔기에 우리나라에서 <아래> <거기>하듯이
여자의 성기 표현은 의학용어로 질膣인데 <그 구멍>
재미있는 것은 옛날 시골에서 어린아이들의 성기를 고추와 보리로 비유했으니 혹, 보리가 그 어원은 아닌지?
고대 이집트 문명 사회에선 임신한 임산부에게 밀wheat, 보리barley가 들은 용기에 오줌을 누게 하여 밀이 싹트면 男兒, 보리가 싹트면 女兒, 아무 것도 안 트면 임신이 아닌 것으로 진단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로 보아 우리말의 보리와 이집트의 보리는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
영어에서도 여성 성기를 질膣이라는 의학용어로 바자이나bagina 또는 같은 동의어지만 음문陰門 할 때는 벌바vulva로 표시하지만, 우리가 일상으로 여성 성기를 질이니 음문이니 하지 않고 (보지)하듯이그들도 푸씨(pussy : 털이 있고 부드러운 것, 고름 같이 라는 뜻)라고 한다. 비속어로 홀hole, 쿤cunt 하는 경우도 있다.
남자의 성기도 의학용어로는 음경陰莖으로 보편화 되어 있지만, 그 물건, 좃, 자지, 남근 등이고, 영어로는 페니스penis이지만 우리가 그것 하는 뜻으로 (dick)하던가 삐쭉 솟아있는 물건 하는 뜻으로 칵cock 할 때가 있다. 그 외에 prink, dong이란 말도 쓴다.
영어에서 penis는 라틴어에서 <꼬리, 매달려 있는 것>이라는 뜻에서 생긴 말인데 우리 나라 말의 자지의 어원은 어떻게 지어진 것인지 알 수 없다.
남녀 성행위를 동물에서나 쓰는 <짝짓기>라는 표현을 쓰는가 하면 성교性交, 교접交接으로 표현하는 점잔을 떨기도 하는데, 성기 외적인 성행위도 있으므로 혼동을 초래해서 성희性戱 : sex play를 의미하는지 성기성행위性器性行爲: sexual intercourse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리송하게 된다.
물론 성의 정의가 단순히 종족 보존을 위한 생식 수단이었을 때는 이때까지 통용되어 오던 남성 상징물을 남근, 여성 성기를 음문, 성기 성행위를 성교, 그리고 동물의 교접을 교배交配 또는 교미(交尾:copulation―꽉 짜인다는 뜻의 copulare에서 유래된 말) 식물들의 자웅결합을 交接이라고 써왔어도 충분하지만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우리의 고유명사를 하루속히 제정하는 문제가 시급하다는 의견이 건의되고 있다.
4. 성의 윤리
성의 윤리는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절대적일 수는 없다. 우리들은 과거 보수적인 유교의 전통사회에서 일제 식민지와 6.25전란을 거치면서 급격히 도입된 서구식 성 해방 유입과 더불어 산업사회와 정보화 사회로의 급변하는 와중에 외래의 성 개방을 모방하여 무질서하고 문란한 성 풍속이 만연되어 성의 윤리는 그 개념부터 뿌리 채 뽑혔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단적으로 성의 해방은 남녀평등을, 성의 개방은 성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의 개방이 곧 성의 윤리부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여권 신장 내지 여권 향상과 더불어 성의 해방은 여성들 자신이 남성들 못지않게 여태까지 내밀했던 성을 노골적으로 그리고 도발적으로 표현하는 문예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는(송경아, 최승자, 김혜순, 김언희) 등 개방 풍조도 볼 수 있다.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음악, 드라마 등에 있어서도 음란을 조장하는 듯한 무방비하고 통제의 기준이 없는 성문화 상품들이 범람하고 있어 과연 원초적인 인간의 성, 관능미, 건전한 에로티즘, 비속한 포르노그라피 혹은 저속한 외설물의 기준을 판별하기에 당혹스럽고 성의 윤리, 인식, 가치에 혼란이 오게 마련인 실정이다.
과거에 우리 사회에서는 성에 있어 남성윤리가 관대하게 일상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고 또한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면서도 속으로 즐기는 모순된 윤리 속에서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성 개념의 사회적 공통분모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성 윤리를 논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종교와 성, 문예에 비친 성 등을 참고하여 성의 인식을 바로 하고 성 윤리관을 스스로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5. 문화와 성
성 담론이 이슈화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문화의 유형화, 즉, 탈 이데올로기, 탈 모럴시대로 그리고 계몽주의 이후 이성 중심적 사고보다 감성 중심의 몸의 담론이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하다. 특히 프로이드나 푸코 저작의 소개, 페미니즘 등은 실제적인 성문화의 변화와 더불어 이런 전환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 담론이 본격화 된 것은 1990년 이후부터라고 본다. 최근에는 주체성, 욕망과 쾌락 등을 둘러싼 논의나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고 있다. 특히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정의가 표현된 성 담론을 예술성의 유무로 규정짓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성 담론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성이 개인의 욕망은 물론이고 한 사회의 문화를 읽어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성 담론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의 성 담론은 혼돈 그 자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음란과 엄숙의 양극단을 달리는 무수한 성 담론이 여성들을 혼돈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혼돈은 자신의 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여되었을 때 더욱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성 담론의 공식적 첫 출발은 자신의 성적 환상을 마음껏 표현했던 마광수의 "권태"나 "즐거운 사라"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90년대 초에 나타났던 성 담론들이 남성의 시각에서 성을 바라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마광수가 보여준 다양한 성적 환타지는 그가 여성을 권력의 상징물인 남근에 의해 정복당하는 하나의 대상물처럼 그렀다는 점에서 여성들에게 매우 억압적일 수 있다.
또한 장정일은 현대사회에 팽배해 있는 소외의 문제를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 중 하나로 보고 이를 성의 요소로 표현하였다. 그의 소설이 마광수의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성을 급진적 정치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그가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이제 여성들은 성적 영역에서 주체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상황은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성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는 남성 중심의 권력관계를 깨달았음에도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은 그 견고한 가부장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사회규범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 분열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본다.
성 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다르게 적용되는 이중 성 규범일 것이다. 즉, 남성들의 성 충동은 억제할 수 없다는 생물학의 신화가 남성들에게는 다른 성 관계를 허용해준 반면 여성에게는 철저히 순결을 강요했던 것이다. 남편인 남성은 여성의 몸을 침탈할 권리가 있었지만 여성인 아내는 그러한 권리가 없었다. 최근 들어 여성 상위를 부르점는 여권 신장운동에 힘입어 많은 변화가 오고 있지만 아직도 남성 권위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6. 문학과 예술에 비친 성
문예에 비치는성 문제에 있어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 猥褻/淫亂에 대한 시비이다. 즉 어디까지가 예술이며 어디까지가 외설이냐 하는 시비문제다. 이것은 공통적으로 행정당국과 언론인 간의 시비거리이며 문화와 풍습에 따라 제도를 달리하고들 있다. 우리 나라의 외설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그 한계가 애매모호한 실정이다. 따라서 간략하게 몇몇 외국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사회 통념을 기준으로 외설 여부를 판단하고 있으나 이에 대하여 언론들은 표현의 자유에 관계되는 것을 사회통념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스러운 일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경우 약 20년 전부터 외설이란, 널리 일반에게 인정되고 있는 품위와 인간성에 대한 시대적 기준을 짓밟는 것이라고 막연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또한 법에서도 인간을 타락시키고 부패시키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나열해 보기로 하자.
첫째, 他者危害 원칙에 입각하여 남에게 나쁜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라면 단속을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도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둘째, 不快禁止 원칙이다.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공개를 금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몹시 불쾌스러운 음란물을 즐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반대로 다소 불건전한 것마저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고로 이 기준도 일률적인 적용이 곤란하다 하겠다.
셋째, 미성년자 보호의 원칙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어떤 종류의 출판물이라도 미성년자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공개를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상이나 서점 등에 전시하며 판매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등지에서는 우리나라같이 아무 곳에서나 포르노출판물을 쉽게 접할 수 없다. 사이버 상에서 18세가 아니면서도 18세라고 하면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니 쉽게 sex site를 볼 수 있지만 반드시 경고문이 있어 경각심을 환기하는 배려를 하고 있으며 또한 ID를 요구하고 있으니 효력이 있는 조치라고 볼 수 있겠다.
넷째, 인쇄물은 아무 제한을 받지 않도록 인쇄권의 보호원칙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미성년자에게는 다소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성인들은 음란물을 즐길 수 있는 愚行權이 문제가 된다. 즉, 무엇이 나쁘다, 그런 것을 보면 안 된다는 등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에 속하는 것인데, 정부가 그런 것을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이다. 현대의 음란물은 아무래도 포르노그라피가 그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Pornography는 그리스어에서 포로로 끌려와 창녀가 된 여자를 뜻하는 Porne과 그린다는 뜻의 graphos의 합성어에다. 그리고 성애性愛를 다룬 하나의 예술을의미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여 음란물로 인식되어 버렸다. 그리고 외설이라는 에로티카Erotica, 포르노그라피 등, 성에 관한 문예의 기준도 어디까지가 외설이고 어디까지가 외설이냐가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어떤 면으로는 성희도(性戱圖:포르노그라피)가 성의 Text일 수도 있고, 반대로 다만 욕구충족을 위한 자극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7. 페미니즘의 시학
Feminism의 사전적 용어: 여권주의, 남녀 동권주의, 여권 신장론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페미니즘은 '성적 불평등의 이론'sexual politict이나 '여성 해방 운동', '막시스트적 여성운동'과 같은 접근을 통하여 성차별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 이데올로기로 인식하여 왔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문학 비평은 다분히 문화사적 비평의 입장을 띠고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주는 사회·문화적 메시지가 '페미니즘 문학'이라는 언어적 메시지만큼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을 딛고 선 페미니즘 문학 비평은 기존의 남권주의, 부권주의적 사회체제와 이성 중심주의, 남근중심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지배하에서 소외되고 왜곡되었던 여성의 경험과 여성성feminity, 여성의 정체성, 여성원리를 통하여 여성 텍스트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문학 연구 방법론이다.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란 시몬느 보봐르의 명언이 담긴 "제2의 성"이라든가 억압되고 왜곡된 여성 이미지를 현대 영미 소설가를 통해 고발한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sexual poritics,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나만의 방"a room of one's own과 같은 초창기 운등에서부터 "황무지에 선 여성 비평"의 케서린 스팀프슨, 제인 에어에 대한 새로운 조명인, 산드라 길버트와 수찬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은 문학에서 페미니즘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문학사에서도 여성작가들은 자주 평가절하 되어왔다. 설사 인식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작품은 작가의 괴팍함과 신경증의 증거이거나 삼류작가, 통속작가란 칭호가 뒤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문학 텍스트를 발굴하고 재조명하고, 억압되었거나 왜곡되었던 여성 이미지를 찾아내어 여성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여성성의 원리, 여성 정체성, 여성의 문학적 시각을 살려내는 작업이 끈질기게 요청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여성들 자체 내에서 난관에 봉착하였다. 여성 자신이 여성임을 깊이 인식하고 나서 여성의 글쓰기가 행해졌는지, 아니면 남성의 로고스중심주의나 남근중심주의에 기운 상태에서 남성적 시선으로 글쓰기가 행해졌는지 가려져야 하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에 텍스트 연구 대상으로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간략하게 다루어보았다.
1) 김남조
이제 나 다신 너 없이 살기를 원치 않으마/ 진실로 모든 잘못은 너를 돌려 놓고/ 살려던 데서 빚어졌거니/ 네 이름은 고독/ 내 오랜 날의 뉘우침이/ 네 앞에 와서 머무노니/ ―<고 독> 부분
"고독"을 "너"라고 부름으로써, 주체를 구성하는 감정 상태의 한 형태로부터 주체의 존재 의미를 조건 지어 주는, 주체와 동등한 인격으로 부상된다.
산이여/ 언제고 너를 바랄 때마다/ 내가 젊었다는 한가지가/ 구렁이만치 징그럽고 싫어졌던/ 그 마음 알리라/ ―<산> 부분
밤이여/ 당신을 어머니라 부르게 하십시오/ ―<밤> 부분
위의 시구들에서 드러나듯,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사물에 국한되지 않고 인격체나,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객관화하여, 타자화 된 자아와 '나 ― 너'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타자를 나와 1:1의 특수한 관계를 가진 대상으로 의미화 하여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한다. 또한 다른 시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남조 시인은 '품음'을 통해 여성의 수용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종결 양식의 특이함이다. 단적정인 판단이나, 확신투의 어법, 자기주장의 진술을 기피하고, 독자에게 암시와 여운을 남김으로써 의미의 개방화를 유도하는 종결양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아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이 세찬 빛발속에서 명별하며 있다지요/ ―<만종> 부분
나는 차라리 열병 앓는 소녀였음이여/ ―<태양의 각문> 부분
오오 落日/ 인젠 피 흘리며/ 당신이 죽어가심이여 / ―<落日> 부분
김남조의 작품들은 다양한 의미, 다양한 문체적 특징들을 드러내는 가운데서도 통합 테마로 추출될 수 있는 것은 [자기 존재 의미의 구축], [자기 존재 확인] [자아의 정의] [자기 응시]이다. 김남조의 시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Anti- Feminism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여성의 시를 조명할 때 주목받게 되는 것은 그의 시들이 여성적 속성, 여성 원리를 가장 함축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2) 김혜순
너는 나를 짓밟는다/ 때묻은 뒷꿈치로/ 나를 짓뭉게고 뒤흔든다/ ―중략―/ 그 다음 나는 너를 쥐어짠다/ 입술이 뒤틀리고/ 숨겨둔 봄의 씨앗들이 터져 나온다/ ―중략―/ 너를 패대기친다/ 나는 너의 골통을 쳐부순다/ 나는 너를 피 흘리게 한다/ 그리고 너의 깊디깊은 잠과 함께/ 나도 이제 죽어간다/ ―<복수> 2-3연 중에서
김혜순의 시에서는 생명감이 넘치는 상상력, 기발한 아이디어, 웃음을 자아내는 위트가 도처에 발견된다. 그녀의 생명감 넘치는 상상력들은 "폭력적이고 위압적이고 공격적인 언어"로 나타난다.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흔히 매우 앙칼진 성격의 소유자들이고 그들이 연출해 내는 행위들은 매우 살벌하고 가학적"이라고 논평되기도 한다. 특히 비틀린 언어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김혜순의 시를 매우 개성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면서도 또 한편으론 그의 시를 사적인 것으로 제한하는 역기능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평이 매우 흥미롭다. 여성 독자의 입장에서 독해한다면 그녀의 시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 일반의 의식을 대표하는 "공적"인 글쓰기로 인정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남성적 시각과 여성적 시각의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차에 오르는 순/ 간, 머리는 땅에 떨어지고/ 몸만 떠나네./ 문이 닫히고 발/ 차, 머리는 차를 따라오는데/ 스폰지처럼 몸만이 알코올에 스미네./ 점점 스미네. 정신을 잃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저 높은 하늘엔 음흉한 구름/ 저 멀리 바다엔/ 은밀히 이동하는 새떼/ 그 사이로 숨죽인 음흉한 바람/
차에 내리는 순/ 간, 몸은 남고/ 두 발만 땅에 내리네./ 문이 닫히고 발/ 차, 젖으며 젖으며 몸은 불끈 차에 실려/ 떠나가 버리고 두 발은 어디로/ 가야 좋은지. 전봇대 높이/ 올라갈까? 닫힌 문 밑으로/ 새어나오는 밝은 빛에 발을 씻을까?/ 내일은 어느 배꼽을 싣고 다닐 것인지./ 어느 주인이/ 네 두 발을 거느릴 것인지/ 잠이 오네./ ―<막차> 전문
귀가 시간에 쫓기는 만원 막차 버스의 성급한 발차를 인체를 토막쳐서 시각화하여 보여준다. 잘리는 인체의 의미화와 더불어 [순/간], [발/차]와 같은 단어도 형태적으로 분리되어 잘리는 형태로 나타난다. 만원 버스의 상황에서 미처 차에 타지 못한 머리는 떨어지고 몸만 차안에 들어간 상태를 1연이 보여준다. 2연에서는 다시 만원 버스가 정차할 때 몸은 차안에 떨어뜨리고 다리만 간신히 땅에 내리는 환각적 상태를 술하고 있다.
아버지가 허수아비를 만드신다/ 어머니 저고리에 할아버지 잠방이를/ 꿰어서 허수아비를 만드신다/ 아버지가 가을 한낮에 허수아빌 만드신다/ 낡아빠진 군모에 구멍뚫린 워카를/ 꿰어서 녹슨 메달을 매다신다/ 아버지가 허수아빌 세우신다./ 넓고 넓은 가을 들판에/ 아버지가 허수아빌 세우시고/ 넝마들에게 준엄하게 이르신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황산벌에 계백 장군 펄럭인다/ 장검 대신 깡통 차고 늠름하게 펄럭인다/ 칼에 베어버린 처자식은/ 논두렁 자갈 되어 굴러 있고/ 단칼에 흘러 버린/ 신라 경계는/ 세월이 지워 버렸는데/ 계백 장군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 혼자서 흔들린다/ 그 뒷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입다물고 귀막은 적막강산이/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전문
계백 장군은 허수아비가 되고 아버지가 된다. 허수아비가 깡통을 흔들어 쫓듯이 계백 장군은 큰 칼로, 아버지는 남성의 권위로 쫓는다. 허수아비가 쫓는 참세 떼는 계백 장군이 쫓은 신라 병사가 되고, 남자들이 버린 처자식으로 비유 체계가 전이된다. 결국 별판에 남은 것은 계백 장군 혼자, 허수아비 혼자다. 그리고 함축적이지만 아버지 혼자다. 가부장적 독재자로서 입 다물게 하고 귀 막게 한 아버지의 독재만이 적막강산을 다스리고 있다. 불평등한 가족 관계가고발펴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그대 숨이 내 숨으로/ 들어오면 머리 위에서 신나는 풀들이/ 파랗게 또는 새까맣게 일어선다 오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 중
이 세계에서는 갈등이 해소되고 화해가 이루어진다. 고립된 자아들 사이에 놓여있는 단절의 심연이 사라지고 화합의 새로운 공간이 역동적으로 피어난다.
피칠을 한 숯덩이가 내 몸 속을 굴러다니나봐요. 갑자기/ 왼쪽 눈이 환해져요. 또 어떤 날은 목이 환해지면서 모두에/ 게 들려요. ―<너와 함께 쓴 시> 중에서
열망으로 내 배꼽이 환해진다. ―<참 오래된 호텔> 중에서
눈물샘이 환해진다. ―<출구를 찾아라> 중에서
한편, 김혜순의 에로스가 환하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위 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 환함은 불과 물 모두에 해당되는데, 그녀가 드물게 보여주는 이상향의 정면에서의 모습이 지니는 속성이기도 하다.
3) 김언희
이 가죽 트럼크/ 이렇게 질겨빠진, 이렇게 팅팅 불은, 이렇게 무거운/ 지퍼를 열면/ 몸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 수취거부로 반송되어져 온/ 토막난 추억이 비닐에 싸인 채 쑤셔박혀 있는, 이렇게/ 코를 찌르는, 이렇게/ 엽기적인/ ―<트렁크> 전문
이 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트렁크로 상징되는 시체의 이미지이다. 천박한 몸의 개념 하에서 보면 시체를 수취 거부하고 반송한 존재는 상징계의 아버지의 법이 된다. 천박한 몸의 극치를 보여주는시체를 통한 상징계에 대한 기호계의 장악 음모는 그녀 시의 트렁크에서뿐만 아니라 시 전편에 걸쳐 반복적으로 출몰한다. 그것은 주로 몸에 대한 패러독스, 아이러니,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경멸에 가까운 혐오의 감정, 민감한 자의식의 투사,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에서의 육체성만이 전경화 된 살풍경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한다/ 물을먹여가며한다/ 하품을해가며꾸꾸벅/ 졸아가며 한다/ 한다깜빡/ 굴러떨어질뻔하면서그는/ 그가왜하는지/ 모른다무엇/ 과,하고있는지도/ 부르르진저리를치면서그가/ 한다/ ―<한다> 부분
이 시가 보여주는 언어의 잉태는 지시적인 대상을 상실한 기표의 무한한 흐름이다. "한다"의 목적은 목적 없는목적, 다시 말하면 무수한 생산성이 최종 목적이다.
가랭이 사이로 자궁을/ 가랭이 사이로 오장육부를/ 가랭이 사이로 영혼마저 �어낸 나를/ 속창 빠진 나를/ 하느님/ 꽈리/ 부시네 ―<꽈리 부시네> 일부
내용과 의미와 중심을 상실한 꽈리야말로 이 시대의 삶의 형식일까? 존재의 방식일까? 입에서 흘러나오는 통탕대는 감탄사들, 부사들, 갑자기 늘어지고 빨라지는 동사들로 채워지는 김언희 시의 독특한 통사법일까? 그녀의 시는 꽈리같이 단순하고 쫄깃쫄깃하다. 최소한의 말들로 즐겁게 해주기, 꽈리처럼 얇고 단순하게 말하기, 아니, 그 말의 의미조차 벗겨 버리기, 그렇다. 우리는 언어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꿰뚫어 좀 더 정확한 욕망을 보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이 시집이 독자의 흥미를 강렬하게 끌어들이는 이유는, 시집 곳곳에 박혀있는 그 거짓스런 블랙유머가 우리의 삶의 경험을 증류시켜 주는 독특한 필터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시 속의 육체는 포르노 영화관의 복도에서 본 듯한, 주홍빛 공포를 걸치고 다닌다. 그 공포는 이 시대의 독자에게 독특한 원한을 뿌린다. ―[시와 사상] 1996년 봄호―
4)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최승호 시인은 이 시집에 대해 김언희는 대담하고 집요하다. 도발적이고 엽기적이며 가차없는 언어들로 괴기스런 지옥을 연출한다. 번뜩이는 광기와 노골적인 악마성, 추악한 범죄의 냄새, 그리고 역겨운 환상, 이 모든 것들이 반죽되어 비현실적인 악몽의 느낌을 주는 끔찍스런 지옥이 나타난다. 그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독자를 고문하는 잔혹한 예술, 난자당한 상처와 음란한 피와 혐오스런 시체를 무대로 끌고 나와서 지옥이 어떤 것인지를 거침없이 폭로하는 잔혹한 시, 거기 사용된 강박적인 언어들을 나는 [도살장의 언어]라고 불러본다 라고 하였다.
육절기로 썰어 넘기는/ 책장 한 장 한 장이 혓바닥이다/ 흠씬 피를 빨아먹는 페이지/ 페이지, 면도날로 밑줄을 친/ 붉은 밑줄들이 줄줄 흘러내리는/ 이, 책이/ ―<이 책> 부분
모듬회 접시 한가운데/ 그 섬이/ 있다/ 난자당한 살점들이 에워싸고 있는,/ 그/ 섬에/ 닿고/ 싶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전문
너는 나를 뿌려진 나를 밟고 간다/ 즈려밟는 발이 내 몸 속에 푹푹빠진다/ 중략/ 오오 나, 보기 역겨워/ 역겨운 역겨운 역겨운 노래를 부른다 눈구멍 콧구멍귓/ 구멍으로 내장을 몰고/ 중략/ 염통이 있어야할 자리에/ 구두 한 짝이 박혀 있다/ ―<역겨운 역겨운 역겨운 노래> 부분
이 시집의 관점에 따르면 사람들은 모두 모듬회의 살코기들이다. 정현종이 가고 싶어 했던 섬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지만, 김언희 섬은 모듬회 접시 한가운데, 난자당한 살점들에 에워싸여 있다. 오규원의 절창 [한 잎의 여자]는 [한 잎의 구멍]으로 변주되고, 그런 변주의 그로테스크함은 소월의 친달래꽃에 대한 패러디에서 절정에 달한다. 진달래꽃이 뿌려져있던 자리엔 꽃빛으로 뭉그러진 살이 뿌려져 있다. 떠나는 사람의 발이 그 살 속에 푹푹 빠지고, 눈과 코와 내장이 발에 엉겨붙는다.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는 실로 역겨운 책이다. 그 역겨움은 잔인하고 처참한 영화를 보고 났을 매의 느낌과 유사하다. 시종일관 털 난 구멍과, 똥과, 시체, 토막 난 신체, 씩어 허물어지는 몸 등의 이미지가 집요하게 독자를 고문한다. 여자는 구멍이고 남자는 뱀이다. 사람은 모두 뱀이고 구멍이다. 몸은 조각난다. 인간의 자기모멸과 자기 몸에 대한 증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김언희의 시는 그렇게 신체의 상상력, 육체의 감수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구멍, 그것이 곧 사람이다.
지긋지긋하다./ 똥구멍이빨간시도/ 씹다붙여둔껌같은섹스도/ 쓰고버린텍스같은생도/ 지긋지긋해지긋/ 지긋하옵니다아버지/ 풍선의대가리를자르고돌을채우는일도/ 있지않은구름다리를벌벌떨면서건너는연애도아버지/ 지긋지긋하옵니다뻐꾸기시계속에서/ 시간마다튀어나오는아버지의/ 면상도색다른털벌레도/ 지긋지긋하옵니다/ 가래처럼찐득거리는희망도/ 손가락이열개나달린이구멍도/ 저뱀자루도아버지지긋/ 지긋하옵니다/ 벗겨주소서/ 벗겨내주소서아버지/ 나를아버지/ 콘돔처럼아버지/ 아버지의좃대가리에서아버지!/ ―<벗겨내주소서> 전문
변기 속에서 나는/ 젖은 티슈처럼 풀어진다 비명도/ 고통도 없다 나는/ 포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할른지도/ 모른다/ ―<달걀 속에서 주루룩> 부분
육체의 감수성을 극단화시킴으로써 김언희는 정상성의 한계를 훌쩍 넘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버린 육체의 언어를, 꿈틀거리며 촉수를 뻗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시인에게나 우리에게나 가능한 한 빨리 깨어나고 싶은 악몽이다. 그 악몽 속을 헤매기 위해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리비도의 촉수가 되는 것, 말하자면 일종의 자포자기다.
이리 와요 아버지 내 음부를 하나 나눠드릴게 아니면/ 하나 만들어 드릴까 아버지 정교한 수제품으로 아버지 웃/ 으세요 아버지 아버지의 첫날밤 침대맡에는 일곱 어머니/ 의 창자로 짠 화환이 붉디 푸르게 걸려 있잖아요 벗으세/ 요 아버지 밀봉된 아버지 쇠가죽처럼 질겨빠진 아버지의/ 처녀막을 찢어드릴게 손잡이 달린 나의 성기로 아버지 아/ 주 죽여드릴게 몇 번이고 아버지 깊숙이 손잡이까지 깊숙/ 이 아버지 심장이 갈래갈래 터져버리는 황홀경을 아버지/ 절정을 아버지 비명의 레이스 비명의 프릴 비명의 란제리/ 로 밤단장한 아버지 처년 척하는 아버지 그래봤자 아버진/ 갈보예요 사지를 버르적거리며 경련하는 아버지 좋으세요/ 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를 뿌리째 파내드릴게/ ―<가족극장, 이리 와요 아버지> 전문
뚜껑을 잃어버린 주전자는 함부로/ 몸을 굴린다/ 귀 떨어지고/ 코 떨어지고/ 혀 떨어지고// 자지가/ 대가리에 옮겨 붙은 놈/ ―<이따만한> 부분
그녀의 시집은 너무 위험하다. [살인적인 음란]이 독자를 고문한다. 오죽 하면 자서에 [임산부나 노약자는 읽을 수 없습니다. 심장이 약한 사람, 과민체질,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읽을 수 없습니다. 이 시는 구토, 오한, 발열, 홍분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드물게 경련과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똥 핥는 개처럼 당신을 싹 핥아 치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치 유해성 광고문이나 독극성 약물의 주의서, 괴기영화의 자막 같은 문구를 자서로 나열해 놓고 있다.
8. 끝맺으면서
현대 사회는 성의 홍수시대라고 할 만큼 성에 대한 표현이 폭증하고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기준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성을 표현하고 논의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제는 성에 대한 논의를 굳이 숨기려하거나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이것이 우리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볼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이 생긴 이래로 성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따라다녔다는것은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인류문명이 발달하면서 성의 문제도 다양하게 변천해 왔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성담론은 있었고 이와 함께 성에 대한 규제도 뒤따랐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지나치게 노골적인 성 담론이나 지나치게 피해망상에 젖어 언어 폭력적인 문학을 양산하는 것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피폐하게 한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다. 인간은 결코 상품화 될 수 없고 상품화 되어서도 안 된다. 성에 존재하는 억압과 모순을 규명하고 이의 극복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 성 담론을 이해하고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성 담론의 배경을 인식하여 우리 사회에 알맞은 성문화와 성 담론들이 거론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성 담론과 여성성에 대한 문제를 다방면으로 파악해 보기에는 너무 방대하여 대충 대충 짚고 넘어 가는 식으로 마무리하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김언희의 시집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를 읽으면서 엘리느 시쿠스의 에세이 [메듀사의 음음]에서 "당신 자신에게 쓰시오. 육체도 말해야 합니다. 그때서야 무의식의 엄청난 원천이 샘솟을 것입니다"라고 여성 글쓰기의 유명한 선언에 부응하는것으로 착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책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시가 인간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가장 차원 높은 문학이라고 한다면, 통제 불능적인 타락의 끝을 치닫고 있는 김언희의 글이 우리에게무엇을 던져주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개성있고 다양한 문학이 공존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집을 읽으면서 언어의 공해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하는 노파심을시종일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저자 자신이 [제 시는 아이들에게는 금서]라고 말했듯이 김언희의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에 쓰인 언어들을 [중금속의 언어]라고 감히 명명해 본다.
◎ 참고서적 ◎
1. 한국 폐미니즘의 시학 (동화서적)
2. 김혜순 시집 :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3. 김언희 시집 : 트렁크 (1995),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저 여자
4. 성민엽의 : 몸의 시학, 역동적인 에로스 (문학과지성사)
5. 시와 사상 1996년 봄호 및 이재복 평론집
6. 문학비평론 : 부민문화사 및 예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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